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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아람 & 고대영 기획전] 탭, 언탭(Tap Untap), 2021년 1월 3일(일)~2021년 1월 25일(월), 소쇼
    전시 Exhibition 2021. 1. 5. 11:07

    황아람 & 고대영 기획전

    탭, 언탭​ Tap Untap

    2021년 1월 3일(일)~2021년 1월 25일(월)

    소쇼



    <탭언탭>을 위한 네 개의 메모

    글: 이연숙(리타)

    #디지털 피로

    ‘디지털 네이티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구분 없이 대부분의 삶을 온라인에서 산다. 디지털 정체성과 실제 공간의 정체성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대신, 그들은 하나의 정체성(두 개 또는 세 개 아니면 그 이상의 다른 공간 안에서 표현되는)만을 가진다. [’디지털 네이티브’는] 그들이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는데 쓰는 시간의 총체, 그들의 멀티 태스크에 대한 선호, 디지털 기술에 의해 매개되는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려는 경향, 그리고 새로운 지식과 예술적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하는 그들의 패턴을 포함하는 일련의 일상적인 실천과 결합한다.

    John Palfrey & Urs Gasser, <Born digital: Understanding the First Generation of digital Natives>

    온라인이 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당신은 언제나 켜진on 상태로서 당신의 온라인 현존을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탈출하기 위해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그들은 분명 여전히 그러고 있다), 단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사용하고 온라인에 접속할 때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이, 판타지적인 역할 놀이와는 정확히 반대된다는 뜻이다. [바로] '실제' 세계에서의 세세한 것들과 대인 협상을 통한 일상적인 분투 말이다.

    Gene Mchugh, “The Contest of the Digital:A Brief Inquiry into Online Relationships”, <You Are Here:Art After the Internet>

    넷플릭스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에서는, 유명 SNS의 전직 개발자와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등장해 SNS가 개인과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을 고발한다. 이들은 SNS가 사용자의 취향을 분석하고 예측하고 제공하는 메커니즘을 통해 사용자를 중독시키고 비판적 인식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비관적 전망을 공유한다. 그러니까 필립 K. 딕, 윌리엄 버로스, 윌리엄 깁슨─이 세 사람은 모두 약물 중독이라는 주제에 관한 대가다─의 디스토피아적 미래는 이미 도래한 셈이다. 문제는 SNS로 인한 자기 통제력의 상실이나 주의력과 집중력 장애, 보상(쾌락) 회로의 변형 등에서 우리가 벗어날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SNS를 포함한 온라인 활동이 오프라인이라 불리는 ‘실제’ 삶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리 불가능성은 오프라인이라는 ‘몸’-온라인이라는 ‘정신’의 데카르트적 이원론에서 무엇이 ‘본질’인지 결정하기보다, 온라인 공간을 우리 세대의 물질적 현실로서 탐구하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소셜 딜레마>가 많은 대중을 협박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디지털 매체가 ‘실제’ 삶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관점은 여전히 폭넓은 공감을 얻곤 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이제는 널리 알려진 ‘디지털 디톡스’라는 신조어는, 디지털이 주는 경험과 감각에 ‘절여진’ 우리의 뇌를, 일정 기간 동안 디지털 기기를 ‘단식’함으로써 해독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 자가 치유 self-therapy를 가리킨다. 구글에서 ‘디지털 디톡스’를 검색하면 많은 실패기가 출력되는데, 이는 (다른 식이요법이 의지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운 것처럼)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디지털 디톡스’는 성공했을 때 비로소 흥미로워지는데, 왜냐하면 이 성공이란 대부분 온라인상에 게시됨으로써 비로소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정한 의미에서 ‘디지털 디톡스’에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의 존재를 ‘나는 자연인이다’와 같은 다큐멘터리에서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적으로 ‘디톡스’를 지향하지 않더라도, 디지털 매체의 부작용을 경계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 역시 ‘실제’ 삶에서 불편함을 겪는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니콜라스 카는, 인터넷이 인간의 읽고 쓰고 말하는 능력 전반의 질적 하락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면서도 이 책이 집필되고 출판되는 과정 전체가 휴대폰, 컴퓨터를 포함한 디지털 기기에 의존적이었음을 씁쓸한 어조로 밝힌다. 여기서 니콜라스 카를 비롯한 인본주의적 매체이론가들이 복구하고자 하는 ‘실제’ 삶이란, 손으로 쓴 ‘종이 원고’를 직접 편집자에게 건네주는 19세기적 풍경에 가깝다. 이제 그런 식으로 사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약 온라인 공간이 ‘이미’ 물질적 현실이라면, 이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제거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 속하는 우리 중 대부분은 굳이 적응하거나 배우려는 노력 없이도 온라인 공간에서 자아의 일부를 형성해왔다. 따라서 ‘디지털 네이티브’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축적된 시간과 경험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구성하는 것을 삶의 근본적 조건으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하다. 그러나 이는 ‘디지털 디톡스’가 암시하는 디지털 매체의 부정적 영향 바깥에 ‘디지털 네이티브’가 속한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디지털 네이티브’에겐 탈출할 바깥이 없다. SNS를 포함해 뱅킹, 쇼핑, 채팅과 같은 일상적 행위에서부터 대부분의 노동 환경에서 강제되는 크고 작은 디지털 기술들은, 사회적/경제적 존재인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우리는 기술을 매개로 지나치게 연결되어 있기에 서로를 증오한다. 예컨대 전통적인 방식의 대면 회의가 ‘단톡방’으로 전환되고 노동자는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알람에 일의 연장으로서 반응하기를 암묵적으로 요구받는다. 플랫폼 비즈니스가 제공한 배타적인 편리함은 매끈한 애플리케이션의 인터페이스가 모른 척하는 ‘필수 노동자’들의 ‘영웅적 희생’을 필요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간단히 접속(on) 하거나 빠져 나오는(off) 하는 방식으로 디지털 기술과 ‘부수적’이라 말해지는 착취의 현장에서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디지털 네이티브’가 속한 세계 내에서 재난은 클라이막스 없는 느릿한 폭력으로 감각된다. 이는 ‘디톡스’로는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잔존한 트라우마이자 만성화된 피로감이다. <소셜 딜레마>를 비롯해 <이어즈 앤 이어즈>나 <블랙 미러>와 같은 SF 드라마가 제시하는 재난의 사고 실험들은, 예언자적인 태도로 기술 발전에 대한 무비판적 환영과 수용을 엄숙하게 ‘경고’한다. 디지털 기술의 ‘잠재된’ 파괴력을 힘껏 비관주의적으로 몰아붙이는 이런 식의 재현은, 대중의 기술공포증에 기생할뿐더러 그것을 부추긴다. 한 편으로는, 기술 발전을 가속화하고 이를 물신화하는 ‘젊고’ ‘부유한’ ‘남성’의 얼굴을 한 기술애호가들이 ‘진보’의 이름으로 화성을 테라포밍하고 인간종의 확장을 시도한다. 이러한 양극단에서 현실은 기껏해야 유토피아/디스토피아적인 미래의 과도기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미래의 재난이 현실을 앞지를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트위터 관상학

    다른 SNS와 다르게 짧고 빠르게 자신의 의견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트위터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 행동을 가시화하고 여성, 유색인, 성소수자 집단의 힘돋우기(empowering)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이는 트위터의 여러 가지 특성(‘리트윗’ 중심, 140자 내외의 단문으로 강제된 ‘트윗’, ‘팔로우’를 중심으로 한 폐쇄적 타임라인 등)에서 기인한 결과다. 초창기 문화인류학과 사회학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트위터는 한때 ‘거대서사의 흐름을 거부하고 침식하는 개별 서사들의 목록’(리오타르)을 실현하는 자유로운 ‘담론장’(하버마스)으로 이해되었다. 블로그가 한 개인의 취향이나 일기 등의 역사를 병렬적으로 나열함으로써 사용자의 총체적 역사를 조망할 수 있게 해주는 폐쇄적인 성격을 가진 매체라면, 트위터는 정보가 (‘리트윗’ 등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유입되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불균질한 속성을 가진 매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트위터는 태생적으로 정보의 축적이나 유지가 아닌 교환을 그 작동원리로 하는 매체이므로, 개인의 트위터 계정에서조차 어떤 완결된 서사를 추출해내기란 어렵다. 그러나 트위터 사용자의 ‘인정 투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트윗들이 얼마나 통합된 인상을 제공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지 않다. 문제는 개별적인 트윗들이 얼마나 즉각적으로 많은 반응을 불러일으키느냐이다. 이러한 논리는 개별 이용자에게 중요한 것뿐만 아니라, 트위터가 전반의 생태계에서 더없이 중요한 문제다. 하나의 독립된 트윗이 얼마나 많은 ‘리트윗’과 ‘좋아요’를 받는지는 곧 그 트윗의 (더 나아가서는 트윗 작성자의) 가치를 결정한다. 트윗 제공자가 여기서 평소에 얼마나 맞는 말을 했고 재미있는 말을 했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독립된 트윗이 충분히 흥미롭다면 트윗의 원작성자의 의도나 성향과는 무관하게 리트윗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타임라인에 전시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별적 전시는, 리트윗된 해당 트윗의 작성자와 무관하게 사용자가 자신의 타임라인에 어떤 맥락으로 특정 트윗을 놓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능동적인 과정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서는 원래 작성 의도와는 다른, 상반되거나 혹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독립적 트윗의 가치가 평가되는 방식은, 블로그와 같이 '글쓴이'의 축적된 아카이브들로서 그 기준을 제공받는 것도 아니고, 페이스북처럼 개인의 사회적인 위치가 수백 개의 '좋아요'를 수여하는 것도 아니다. 트윗은 이리저리 떠돌다 사용자에게 능동적으로 선택되어, 사용자의 타임라인을 구성하는 파편으로서 트윗 작성자의 권위가 상실된 채 무력하게 놓여진다. 이런 과정에서 트윗은 작성자와 분리되어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대상으로서 읽혀지기를 기다리고 있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트위터는 분명 ‘저자의 죽음’을 기쁘게 환영하며, 민주적 가치(‘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대의 SNS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분산되고 파편화된 ‘트윗’의 독해 불가능성은, 고전적 의미에서의 ‘얼굴’과 ‘이름’에 대응되는 ‘프로필 사진’과 ‘닉네임’과 더불어 일종의 관상학적 기호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사용자의 정체성을 대변하거나 혹은 또 다른 정체성 그 자체로서, ‘아바타’ 즉 사용자의 ‘분신’이 가진 해방적, 급진적 가능성을 타진한 연구들에서도 적잖이 관측된다. 초기 사이버 문화를 미개봉된 유토피아로 그리고자 했던 성미 급한 이들은, ‘아바타’가 사용자의 ‘실제’ 계급/인종/젠더 정체성을 포함해 모든 물질적 조건들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하는 실험적 도구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구성된 ‘아바타’야 말로 진정한 자아의 재현이라 보았다. 이처럼 인터넷상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자기표현도 ‘실제’ 세계 내의 사용자의 욕망을 반영한다는 전제를 공유할 때, ‘트위터 관상학’은 이러한 기술 낙관론자들이 상상한 긍정적 전망의 적나라한 짝패가 된다. 예컨대 한 트위터 계정의 프로필 사진과 닉네임, 트윗들이 결코 랜덤한 것이 아니라면 이는 사용자로부터 (어느 정도라고 해도) 연출된 것이고, 그렇다면 이를 통해 누군가는 해당 계정의 사용자가 ‘실제’ 세계 내에서 품고 있는 자아상을 유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는, ‘트위터 관상학’ 역시 ‘아바타’에 대한 물신주의적 믿음이 작동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실제’ 세계의 몸과 정체성의 한계를 감식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트위터 관상학’의 핵심은 (다른 점법과 마찬가지로), 당사자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그의 (아마도 비참한) 운명을 누군가는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운명이란 누군가가 보고 있을 때만 갑자기 출현하는 것으로, 주관적인 인상에 근거한 ‘느낌’에 불과하지만, ‘느낌’에 들러붙는 경험적 진술들에 의해 떨치기 어려운 성가신 저주의 성격을 띠게 된다. 말하자면 ‘트위터 관상학’은 특정 사용자들이 입은 기호에 대한 느낌이 일종의 리터러시를 형성한 결과로써 가능해진다. 따라서 ‘저런 프사’와 ‘저런 닉네임’을 하고 ‘저런 트윗’을 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어떤 사람일 것이라는 ‘인상’의 형성이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충분한 관찰의 경험이 축적된다면 이들을 직관적으로 분류하고 유형화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직관은 사실, 사람을 상대하는 모든 종류의 직업군에서 흔히 발휘되는 경험적 통찰에 가깝다) 어쨌든 ‘관상학’의 일부인 ‘골상학’과 같은 우생학적이고 유사과학적인 학문이 부흥한 까닭이, 특정 인종의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함이었음을 상기해보자면, ‘트위터 관상학’에도 비슷한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 요컨대 싫은 유형의 사용자들을 계속 싫어하기 위한 핑계라는 것이다. ’애니프사’ 혐오에 대한 ‘애니프사’ 당사자들의 분노와 억울함은, 단순히 트위터 내에서 놀림감이 되었음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타쿠 문화를 포함한) 서브컬처 전반에 투사되어 온 부정적인 속성과 그로 인한 낙인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나무위키 꺼라’ 사건(?)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촉발된 ‘애니프사’를 둘러싼 국지전들이 마냥 일방적인 ‘괴롭힘(bullying)’에 가깝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애니프사’는 2016년 ‘넥슨 클로저스 성우 교체 사건’과 ‘레진코믹스 탈퇴 운동’ 등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반-페미니즘 발언을 지지하고 페미니스트들을 조롱한 역사가 퇴적된 일종의 정신적 공동체이다. 따라서 앞서 인용된 ‘카톡 프사 유형별 분석’이 대부분 남성 사용자를 조롱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애니프사’에 대한 희화화 역시 (최소한 초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애니프사’ 뿐만 아니라 2015년 이후 ‘메갈’과 더불어 ‘넷페미’의 본격적인 부흥은, 트위터 내에서 정치적 세력화를 도모하는 잠재적 이익 집단들에게 선명하게 ‘진영 차이’를 드러내는 ‘프사’와 ‘닉네임’을 사용할 것을 부추겼다. 이는 곧 ‘닉네임’에 주렁주렁 달린 이모티콘만으로도 해당 사용자가 ‘랟펨(래디컬 페미니스트)’인지 아니면 ‘교차페미(교차성 페미니스트)’인지 판별할 수 있게 해주었고, 소위 ‘진영’은 각자의 타임라인을 중심으로 부족화(tribalization)되기 시작했다.



    #웹이라는 육체, 육체라는 수치

    언제부터인가 이연숙이라는 이름보다 자주 리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나는 여전히 어떻게 불리는 게 더 좋은지 모르는 채로 누구님, 누구 선생님, 누구 작가님이라는 존칭 앞에 스티커처럼 들러붙은 리타라는 글자를 볼 때마다 흠칫하고 놀란다. 리타님은 괜찮아. 그럼 달리 뭐라고 하겠어? 그런데 리타 선생님? 리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선생님이 될 수 있나? 만약 진지하게 자기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리타라는 이름 대신 세 글자로 된 한글 이름을 쓸 것이다(아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내적 분열과는 별개로, 이름을 두 개씩 혹은 그 이상을 짓는 일이 소수자의 생존 전략이자 문화적 규칙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다. 당신이 성소수자라면, 우리끼리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터넷 공간에서 사용하는 가명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평판을 보호받기 위해 진짜 이름 같은 가짜 이름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레즈비언 번개에서 만난 누군가의 세 글자로 된 ‘진짜’ 이름에서 스치는 ‘중성적인’ 매력을 감지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공유되는 모든 이름들은 모두 ‘가짜’로 간주된다. (어느 해에 만난 누군가와 6개월가량을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나는 그의 ‘진짜’ 이름을 몰랐다.) 그러한 규칙을 존중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필사적인 역할극을 동반하는데, 왜냐하면 그 가짜 이름에는 이름 주인의 부끄러울 정도의 노골적인 욕망이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고(그걸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한다), 여기가 아니라면 누구도 그들을 그 가짜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그래서 더욱 보고도 못 본 척 해야 한다). 나는 왜 ‘우리’가 닉네임과 예명으로 활동할 수 밖에없는지 ‘배웠’지만, 동시에 이러한 문화가 뿌리 깊은 자기 부정에 근거하고 있음을, 그래서 ‘리타’라는 이름이 어떻게 내게 마른 국물 자국 같은 수치인지를 뱃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감지한다.

    엘스페스 프로빈의 <붉어짐 Blush>는 ‘수치심’과 관련된 저자의 기억을 이브 세지윅의 이론적 틀거리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일종의 비평적 에세이다. 프로빈에게 수치심이란 “겉보기에는 비난받을 만한 사람에게 빠져서, 그에게 숨겨진 장점이 있다는 것을 친구들에게 납득시켜야” 할 때 등장하는 감정이다. 그는 ‘수치심’이 그간 부정적인 감정으로 평가받으며 숨겨야 할 것으로 여겨졌지만, 우리는 수치심 없이 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수치심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자신의 핵심으로 간다. 이런 의미에서 수치심은 한 사람의 자부심 self-esteem을 한계로 몰고 우리의 가치 체계를 의심하게 한다. [...] 당신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은 당신에게 중요한 것, 자신에게 필수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수치심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좋은 매너와 문화적 규범이라는 보편을 넘어, 우리의 가치, 희망, 열망을 정밀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타’라는 가짜 이름이 수치스럽다면 그것은 내가 여전히 ‘진짜 이름’에 자연스럽게 부착되는 정상 규범들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진짜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선택지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삶들을, 나는 질투한다. ‘진짜 이름’은 존경받고, 권위 있고, 인정받는 일들을 해낼 것이다… 때로 ‘리타’라는 닉네임이나 그 이름과 관계한 ‘하위문화’들은 나의 누추한 현실을 가리키는 흉터같다. 나는 물론 내가 속할 장소와 내가 불릴 이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지만, 그것은 옷장에서 입고 벗을 정체성을 고르는 유희가 아니라, 매 순간 피부를 벗기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 ‘별종’으로서의 진통에 가까울 것이다. 아래 소개할 두 논문은 웹이라는 공간이 본질적으로 여성적이라 주장하는데, 이는 곧 섹슈얼리티 해방과 기술 해방이 상호종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사한다. 소위 ‘사이버 페미니즘’이라 불린 1990년대 영미권 페미니즘의 한 흐름 속에서, 생물학적 육체라는 한계는 인터넷 공간이라는 무제한적 가능성 속에서 잊혀지고 평가절하된다. 이들에게 ‘진짜 몸’은 구식 old-fashioned인가? 아니면 ‘리타’라는 닉네임처럼, 이들에게도 ‘진짜 몸’은 수치인가? 아래 논문들에서, 티타늄 소재의 매끈한 여성형 사이보그로 표상되는 ‘진짜 몸’의 이미지는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도나 해러웨이의 1991년에 발표된 논문인 <사이보그 선언문> 이후 연쇄적으로 등장한 ‘사이버 페미니즘’의 실천과 이론들은, 주로 인터넷이라는 무성적 공간에 (이미) 기입된 성차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인터넷을 남성중심적 헤게모니에서 자유로운 여성적 해방의 도구로 간주하는 데서 시작된다. 후자의 관점에서 가장 논쟁적인 이론가인 새디 플랜트는 <영과 일 Zeroes and Ones>에서 최초의 프로그래머인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사례를 다룬다. 타이피스트와 마찬가지로 코드를 ‘짜는’ 일은 추상적 사고를 물질로 변환해내는 ‘수공예’로서 이는 근본적으로 여성적에게 할당된 ‘하찮은 일 chore’이었다. 에이다 러브레이스가 설계한 알고리즘은 현대적 컴퓨터의 시초가 되는데, 새디 플랜트는 이를 예시로 디지털 기술이 (잠재적으로 그리고 언제나) 여성적이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디지털 기술 자체가 남성에 의해 부적절하게 그 여성적 풍부함을 억압당해왔기 때문에, 여기서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디지털 기술의 본래적이고 순수한 잠재성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사이버네틱 창녀들 Cybernetic hookers>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이버펑크와 카오스 문화는 과격한 wild 여성과 나쁜 계집애, 조직의 위반자, 그들 자신의 언어를 찾는 괴물과 돌연변이들, 비회원, 유목민, 역사로부터 남겨진 자들로 가득 차 있다. 너무 빨리 과거에서 미끄러져 미래가 오기도 전에 거기에 접근한 사람들, 남성 man과 사물 things의 세계라는 감금으로부터 도망치는, 한때 모자는 한때 인간 human과 기계 machine이라고 불렸던 이종적 배치들 assemblages, 사이보그와 에일리언, 과거의 안전을 불태우고 스펙타클에 봉사하는 문화의 얼음을 뛰어넘고 스크린을 해킹하며 익숙한 것들을 초과하는 중독자들과 여행자들, 사이버 공간에서 다운로드되는 매트릭스의 아바타들. 이들은 더 이상 인간 human이 아니다. 아니 그들은 한 번도 인간이었던 적이 없을 것이다.”

    이 시적인 탈인간(posthuman)에 대한 묘사에서, 새디 플랜트는 인간(남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는 기술(타자)을 여성주의적 기획 내에 영입한다.

    마찬가지로, <제국의 역습 : 포스트성전환자 선언 The Empire Strikes Back: A Posttranssexual Manifesto>으로 널리 알려진 샌디 스톤의 초기 논문인 <진짜 몸이 있으면 일어나 줄래? Will the Real Body Please Stand Up>에서 인터넷 공간은 그 매력적인 유동성으로 인해 누구든 ‘드레스’처럼 입어야 하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여성의 신체의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이버 공간에 들어가는 것은 육체적으로 사이버 공간을 ‘입는 것’이다. 사이보그가 된다는 것, 드레스처럼 매혹적이고 위험한 사이버네틱 공간을 입는 것은, 곧 여성 female을 입는 것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가상의 인물(이자 여러 실화를 조합한 결과)인 ‘줄리’의 일화를 인용한다. 자신을 ‘장애 여성 노인’으로 소개하는 ‘줄리’는, 여성들로 구성된 온라인 모임에서 다정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호감을 얻고, 많은 동료들과 어울린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중년 백인 남성’이었는데, 분노한 여성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속인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여자들이 인터넷으로 [남성들과의 대화에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박식한 주제로 깊이 있는 친교를 나눌 줄은 몰랐어요. 나도 일부가 되고 싶었어요.” 샌디 스톤은 이러한 일화를 통해 인터넷 공간이 자신을 재창조하고 재발견할 수 있게 하는 유혹적 매개인 동시에, 그러한 욕망에 여전히 현실의 성차를 기반으로 한 ‘다중 정체성이라는 상품을 향한 페티시’가 개입됨을 보여준다.



    #찢긴 살의 공포

    2012년 데뷔한 걸그룹 ‘식스밤’은 다사다난한 멤버 교체와 무명의 시기를 거쳐 2016년, <10년만 기다려 베이베>라는 세번째 디지털 싱글로 화제를 모으게 된다. 이 디지털 싱글은 조악한 디자인과 충격적인 의상의 커버 아트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뮤직비디오로 격렬한 (무엇보다 부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이 뮤직비디오에서 네 명의 멤버(소아, 다인, 한빛, 유청)은 파티룸 컨셉의 공간을 배경으로, 분홍색 전신 라텍스를 입고 소위 ‘경운기 춤’이라 불리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동작을 보여준다. 곧 이 ‘경운기 춤’은 인기 여성 BJ들에 의해 다양한 버전으로 변주되어 유튜브, 케이블, 공중파 방송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경운기 춤’이 뭘 의도했는지, 누구를 타겟으로 삼았는지, 또 왜 유행하기 시작했는지 전혀 추측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1)’경운기 춤’은 유행이 되기에는 너무 평범하다. 흔히 기대하듯 대놓고 외설적이지도, 촌스럽지도, 민망하지도 않다. 아마도 남성이 주로 타겟일, 이 ‘경운기 춤’이 실제로는 맥빠질 만큼 쉬운 ‘안무’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놓쳤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애초에 2)<10년만 기다려 베이베> 역시 전혀 외설적이지 않다. 이건 해당 뮤직비디오가 ‘저예산’, 즉 일반적인 뮤직비디오의 시각적 문법으로 섹시함을 연출할 자본이 모자라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때문에 어떤 보정도 없이 노출된 ‘식스밤’ 멤버들의 피부 표현이 마치 성인 비디오를 연상시키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10년만 기다려 베이베>는 뮤직비디오의 방식으로 외설적이지는 않다─이 뮤직비디오는 고화질 성인 비디오에 가까운 질감으로 연출되었고, 그래서 (최소한 나에게는) 죄책감을 동반한 불쾌감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3)’경운기 춤’을 유행시킨 주역인 여성 BJ들 역시 이 춤을, 역시 흔히 기대하듯, 외설적인 방식으로 패러디하지 않는다. <10년만 기다려 베이베>를 위한 짧은 리서치의 시간 동안, 오히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 뮤직비디오가 (아마도 무의지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맨살’의 질감이 놀라울 정도로 여성 BJ의 영상이 추구하는 일종의 ‘미학’과 닮아있다는 점이었다. 궁극적으로 촉각을 자극하는 이 ‘미학’은, 사실적인 피부의 질감과 동시에 신체의 양감, 무게감을 시청자에게 최대한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화면을 구사한다. 여기서 여성 BJ 본인은 화면 속 움직이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에 개인성을 기꺼이 양도한 결과물로서 존재한다. 대중적으로 인지도를 얻은 유튜버들이 자신의 사생활을 기꺼이 방송의 소재로 이용하고, 이를 통해 시청자들과 모종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할 때, ‘경운기 춤’을 추는 여성 BJ들은 화면 밖에 어떤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 척한다. 방송이 시작되면 이들은 화면 속에 등장하는 것을 넘어서 일방향의 폐쇄 회로─화면 자체가 된다. 거기엔 극도의 수동성만큼이나 초과의, 파열적인 지점이 존재한다. 그들은 그 순간 ‘다른’ 존재로 이행하고 있다─마치 영화 <HER>에 등장하는 신체 대여자처럼─우리 중 대부분은 아직 어떤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들에 대한 어떤 비판이나 변호를 유보해둔 채로, 나는 <글리치 페미니즘>의 서문을 인용해보려 한다. “[보부아르를 따라] 신체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초기 사이버 페미니스트들이 꿈꿨던, 우리가 비로소 젠더의 관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온라인 세계인 순진한 디지털 낙원의 기교가 이제는 허술한 것이 되었을지언정, 인터넷은 여전히 ”되는 becoming" 존재가 그러한 자신을 깨달을 수 있는 용기 vessel인채로 남아있다. 글리치는 신체가 해방을 향하여 나아가는 통로이며, 디지털을 이루는 직물이 찢어진 틈새이다.”



    전시제작

    기획: 황아람, 고대영

    참여: 김솔리, 김혜원

    후원: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디자인: 다운라이트

    사운드: 위지영

    글: 이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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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시간

    화~일요일 11:00~19:00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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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문의

    메일: soshoro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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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쇼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6길 32-4(계동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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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트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p/CJkOb9BJ3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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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에 쓰인 모든 자료의 출처는 소쇼 공식 매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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